생동주의자

33 앎의 과정

핵심 선언

“알다는 길을 걷는 것이고, 안다는 그 길에 도착해서 걸어왔던 길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 “그 사람 잘 알아요. 오래 봤거든요.”
  • “공부는 많이 했는데, 안다는 확신이 잘 안 서요.”
  • “알고 있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은 다른 것 같아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그 말 어디에도, 안다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에 대한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알다’와 ‘안다’는 다른 자리에 있습니다.

씨앗을 생각해보세요. 씨앗이 땅속에서 자라는 과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싹이 땅 위로 올라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다는 그 과정입니다. 씨앗이 땅속에서 움직이는 시간.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안다는 그 결과입니다. 싹이 올라온 순간처럼, 알아가는 과정이 쌓이고 쌓여 어느 지점에서 하나로 맞물리는 상태입니다.

길을 걷는 것과 목적지에 닿는 것은 다릅니다. 알다는 걷는 것이고, 안다는 닿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두 방향이 일치할 때 완성됩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사람을 안다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안다는 것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너를 나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너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너의 감정을 내 것처럼 느끼는 방향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나를 너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내가 이해하는 방향입니다.

이 두 방향이 따로 존재할 때는 알다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 두 방향이 하나로 일치하는 순간, 비로소 안다가 됩니다.


한 방향만으로는 절반밖에 모릅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를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말합니다. “엄마는 나를 몰라요.”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부모는 너를 나로 보는 방향은 열려 있지만, 나를 너의 눈으로 보는 방향은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이를 아무리 깊이 들여다봐도, 아이가 나를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알다의 과정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나의 시선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알다의 과정을 성실히 걸어야 안다에 닿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다는 과정을 서두르거나 건너뛸 수 없습니다. 너를 나로 보는 연습과 나를 너로 보는 연습, 이 두 가지를 꾸준히 함께 해야 합니다.

너를 나로 보는 연습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내가 저 자리라면 어떨까.” 나를 너로 보는 연습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하는 이 말이 저 사람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나는 지금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있을까.”

이 두 질문이 같은 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알다는 조용히 안다로 바뀝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과정 끝에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

안다는 것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 나로 보는 시선과 나를 너로 보는 시선, 이 두 방향이 하나로 일치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알다는 그 일치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과정을 성실히 걷지 않으면 안다에 닿을 수 없습니다. 알아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그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두 방향이 마침내 만나는 순간입니다.

알아야 안다. 그 과정이 쌓일 때, 안다는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