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벌
핵심 선언
“정당한 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 “이 정도는 훈육이지, 폭력이 아니잖아요.”
- “맞는 말을 해줬는데 왜 상처를 받아?”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왜 오랫동안 그 말을 잊지 못할까요. 벌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당하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그 벌이 어디까지 가도 되는지를 묻지 않게 됩니다.
벌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있습니다.
저울을 생각해보세요. 한쪽에는 눈에 보이는 무게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쪽의 무게만 재려고 합니다.
육체적 폭력은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정신적 폭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말로 깎아내리는 것, 반복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것, 틀렸다고 몰아붙이는 것. 이것들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폭력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받아내는 사람 안에서는 같은 크기로 쌓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볍지 않습니다.
‘정당한 벌’이라는 말의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말합니다. “이건 훈육이야.” 어떤 선생님은 말합니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그 말 안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이 벌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정당한 벌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정당하지 않은 벌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당함의 경계를 누가 정하는가, 그 기준이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 없이 벌을 내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정당하다는 믿음이 강할수록, 그 벌이 얼마나 깊이 닿는지를 확인하지 않게 됩니다.
받는 사람의 기준이 먼저입니다.
벌을 주는 사람은 의도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잘 되라고 한 거야. 나는 화가 나서 한 게 아니야.” 하지만 벌을 받는 사람은 결과를 기준으로 느낍니다. 그 말이 어떻게 남았는지, 그 상황이 얼마나 오래 기억되는지.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결과가 선하지는 않습니다. 정당하다고 믿는 벌도, 받는 사람 안에서 상처로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벌은 정말 정당했던 것일까요.
기준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 안에 남은 것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진짜 훈육은 벌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벌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 분명한 경계를 알려주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방식이 육체적이든 언어적이든, 늘 이 질문을 먼저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 사람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단지 내 감정을 해소하는 것인가.”
벌의 목적이 상대의 성장이 아니라 내 감정의 해소라면, 그것은 이미 훈육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쓰는 것과 폭력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깝습니다.
진정한 의미
벌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육체적 폭력이 가장 분명히 보이지만, 정신적 폭력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지나쳐집니다. 그리고 정당한 벌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반드시 정당하지 않은 벌도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 서야 합니다. 그 경계를 매번 확인하는 것. 받는 사람의 안에 무엇이 남는지를 살피는 것. 그것이 훈육과 폭력을 가르는 진짜 기준입니다.
주는 사람의 의도보다, 받는 사람 안에 남은 것이 더 정직합니다.
정당함을 묻는 것, 그것이 진짜 어른의 책임입니다.